방앗간 이야기
시골에서 자라난 나의 유년 시절은 방앗간의 추억이 많이 남아있어
늘 친숙하고 정감어린 대상이랍니다.
물레방아 관련 사진은 산사모 까페 선경나리님글에서 옮겨온 것임을 알려드립니다.
우선 아주 어린시절 아버지께선 말구리 산골에서 청주쪽으로 십리나 더 가까운 곳으로 이사오게 되셨지요.
그리고 6.25 난리 중에 태어나고 ... 그 때 물레방아를 인수하시게 되어 4~5년 운영하시다가
디젤화통방아가 들어와 쇠태하게 되자 농사일과 병행하던 방앗간은 접게 되었네요.
아직도 유년시절의 신비한 장난감으로 비춰지던 공구상자엔 판도라 상자 처럼 낯선 물건들이 그득하였어요.
아브라(피대줄에 미끄럼방지를 위해 문지르던 아스팔트 재질)와 볼트, 피대줄, 오일 주유기등등...
장난감이 없던 시절 한 참을 즐길 수 있는 행복이었습니다.
지금도 그 돌확은 시골집에 보관중이며 방앗간에서 옮겨 오던 모습이 눈에 선합니다.
1.2m도 채 되지 못 한 좁은 논뚝길을 4명의 장정이 목도메고 어영차 희차 발마 추어 옮기던 정경이 떠오릅니다.
그러던 시절이 가고 화통 방아가 운영 되어 가을이면 쌀방아, 6,7월이면 보리방아, 밀방아 빻는 탕탕탕통통통..... 하얀 연기(매연)를
내 지르며 힘차게 돌던 그 방아의 피스턴의 곰배 운동을 보면 참 신기해 하였지요.
그 매연 조차 일부러 맡기위해 얼쩡 대던 동네 조무라기들의
모습을 생각하면 오늘 날과 너무나도 다른 생각(소음, 대기환경)과 정서에 세월을 느끼게 됩니다.
특히나 밀가루 빻던 날은 어머니는 머리에 수건을 둘러쓰고 밀가루 출구통의 상태를 살피면서
누룩원료인 밀기울을 받아내고, 통에 다 빻아진 밀가루를 가득차기 전에 회푸대(종이로 된 겹겹의 유지포대)에 옮겨 담게 되면
어느 새 몸 전체가 하얀 가루로 치장을 하게 되는 모습이 떠오르네요.
그렇데 빻은 가루는 날 좋은 날 무성골 국수집에 가져가서 마른 국수(국수 누르러 간다고 하지요)로
만들어 봄 철부터 가을까지 일바라지 할 때 새참 국수로, 큰일이 있을 때 잔치 국수로 사용합니다.
그 화통 방아는 오늘 날 처럼 떡방아가 일상화 되기 전에 시골에선 설명절 전에
동네 방아 찧고 삯을 받은 대가로 A/S차원에서 무료로 흰 떡가래를 뽑아 주었지요.
우선 동네 떡하는 날을 알리면 집집마다 쌀을 담가 고두밥을 지어 시루째 (식지 않도록 담요로 뒤집어 씌우고...)
지게로 져 날라 방앗간에 도착하면 순서대로 가래떡을 뽑게 됩니다.
동네 꼬마들 잔치날이지요.
물에서 건져낸 흰 떡가래를 잘라내는 대로 받아 먹고 나눠 주고하였답니다.
동네마다 간혹 철거 되지 않고 방치되던 물레방아도 있어서 큰 바퀴 바닥판에 올라 타고
빙글 빙글 돌리면서 놀던 개구장이들이 지금은 다 성년이 되거나 노인들이 되고 말았지요.
또 한 민간 방송업자(앰프와 스피커 설치하여 라디오 대행 써비스.... 오늘 날의 유선 방송 원조)의 축전지(바테리)
충전용으로 사용되던 것이 60년대 말까지의 우리 농촌 생활 상이었습니다.
영화나 소설의 "물레방아간"같은 것은 너무 어리던 시절이라 알 수가 없구요.
진주시 금곡면 두문리의 금곡정미소를 탐방하게 되었습니다.
"앉은 뱅이 밀" 우리 토종 밀가루를 제분하는 곳이 있어 방문하였습니다.
TV방송에 출연한 생활의 달인으로 1942년부터 3대째 이어온 방앗간 이어서 가문의 사업이 된 셈이지요.
방앗간 탐방시 안내해 주신 안 주인님!
제분기술의 발달로 밀기울이 너무 미세하여 부산물 누룩을 만들기 어려워요.
제분의 마지막 관문인 체거름(밀 빻은 것을 공기로 송풍하여 저 둥근 통을 통과한 것이 밀가루가 됩니다)
내부 체거름 망을 보여주시느라 옆마구리 판을 열고 닫다가 그만 밀가루 세례를 받았지요.
낭창낭창 돌아가는 피대줄, 지금은 전기모터에 의해 동력을 쓰니 과거의 화통 방아소리는 없어요.
인터넷쇼핑도하는 우리밀가루( 현미, 국수등 많은 제품 구비)
칼국수도 하고, 수제비도하고 만두도, 부침개도 하면 좋겠지요?